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칸막이 객실>은 마이어스가 자신이 타고 있던 객실이 아닌 분리된 객차의 다른 객실 속을 들어서게 되면서 마무리된다. 잘못된 객실 안에서 그는 새로운 언어와 사람들과 동질 되고 거대한 기차의 일부처럼 느끼게 될 정도로 자신을 향해 떠밀려온 운명과도 같은 장난스러운 흐름을 거스르지 않게 된다. 이때, 마이어스의 자세가 '진행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는 것이 중요해진다. 삶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일은 운명과 우연의 손길에 의해 마구잡이로 정돈되어 그 안을 누비는 객체들이 앞날을 알지 못한 채, 등을 지고 각자가 거쳐온 족적을 바라보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는 삶의 축약 아니던가. 영화의 시대에 이르러서 우리는 앞선 삶을 조금이나마 복기할 수 있게 되는 기술적인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여전히 영화가 삶을 대하는 정답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영화는 '진행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라는 자각을 보다 공고히 해 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들이 그 속성들을 껴안고 탄생하지만 종종 그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말하는 것과 말해야 할 것을 혼동하곤 한다. 좋은 영화는 적어도 그렇게 발견한 진실을 마치 진리 인양 관객들에게 설파하지 않는다.
포크 싱어송라이터인 남재섭에게도 이 의식이 닿아있던 건 아니었을까. 그가 상당한 시네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던 사유는 두 번째 앨범 [당신이 본 세계는 당신의 영화]의 라이너노트에 성실히 남겨져 있었다.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어둠은 걷히고], 에릭 로메로의 [가을 이야기], 에드워드 양의 [해탄적일천], 난니 모레티의 [나의 어머니], 테오 앙겔로플로스의 [영원과 하루]까지. 그가 빌려온 영화의 제목들은 다시 트랙의 제목과 모티프로 주성분이 되었지만, 음악 안에서 이들은 새로운 사유와 형태로 재편성되었다. 영화광이기 전 무엇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영화를 길잡이 삼아 음악과 삶의 관계성을 유려하게 배치해 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포크가 지닌 기존의 빠르기를 떠올려보더라도 남재섭의 음악들은 훨씬 느리게 흐르는 감이 없잖아 있어 보인다. 곡의 길이가 곧 음악가의 진정성과 비례해지는 건 아니지만, 잘 여물어진 음악은 의도를 구태여 감추지 않아도 어렴풋이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당신이 본 세계는 당신의 영화]는 마치 그런 사적인 생각들이 담긴 일기 같기도 하며 여럿 영화를 오마주 하여 각주를 덧붙여 보이는 식으로 밟아온 족적들을 가늠한다. 동료 아티스트인 '김사월'의 보컬뿐 아니라, 앨범 전반적인 중후함을 담당하는 첼로,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등의 요소들은 흔히 '고전'이 가진 고풍스럽고 진득한 맛과도 맞닿아 있고 그렇게 '고전'을 통해 읽어나가는 일이, 삶이 남긴 지난 족적에 발을 가까이 대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걸 음악을 통해 넌지시 풀어내기도 하면서.
첫 곡 <영화>에서 자근하게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악 섹션이 부드럽게 분위기를 조성하며 출발한다. 간간히 어쿠스틱 기타가 주는 투박한 스트로크와 함께 목소리가 들어설 때, 악기가 내는 소리의 질량을 줄여지고, 화음은 고조된다. 이러한 병치는 순간적인 화합이 주는 무게감을 자아내면서도 아티스트 본연적인 색감을, 현악의 집요한 사용법, 중성적인 듯 섬세한 보컬은 앞으로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영화'를 위한 장치로의 주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이렇듯 과하지 않도록 정제된 음악들은 정갈한 마무리를 위해 길고도 유약하게 연주된다는 점이 본질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속 큰 사건이 지나간 뒤의 적적함이 여실하게 묻어나는 코드 진행, 현악과의 조율은 좋은 선례이기도 하며, 이어지는 <어둠이 걷히고>에서 플루트의 역할은 그 흐름 속에 은근히 동조된다. 선명하지 않더라도 보컬의 감정선을 초과하지 않고 희미한 빛처럼 응시할 종점을 내비친다. 이례적으로 김사월의 보컬이 주를 이룬 <해변의 그날>에서는 맑은 기타의 스트로크, 퍼커션의 조밀한 리듬으로 해변의 상황을, 덧붙여 설명하자면 '예전들과 다 똑같은 그날의 바다'를 감미롭게 재현해 낸다. 단순 김사월의 목소리는 과거의 호기롭던 시절을 추억하거나 것과 거리가 멀다. 여린 목소리는 마치 저마다의 감정을 담아 사그라져 축적되는 '모래'의 특질을 닮아 있고, '이런 불확실한 세상에 너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낡아버린 희망'을 다시 꺼내 펴게 만드는 것처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한 복잡 미묘한 감상들은 이어지는 트랙 <나의 어머니>에서 보다 직선적인 형태로 그려지게 된다.
삶과 시간의 고찰, 하루가 반복되어 영원의 태를 만든다는 의식은 <영원과 하루>에서 다소 침침하다가도 극적으로 치솟는 감정선으로 대변된다. 앨범 중에서 가장 음량과 서라운드 사운드가 충실한 <영원과 하루>는 남재섭에게도 있어도 가장 고민거리였던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삶의 지리함이 때론,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닌, 그것이 영원히 반복될 거라는 허탈함에서 비롯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는 '어제의 하루'를 다시 걷게 된다. 마이어스가 등을 지고 자신을 실은 열차의 무분별한 경로 속에 새롭게 몸을 맡기듯, 옆에 자리한 너와 함께 지난 그 몫을 나누고자 한다. <극장을 나와서>, '죽기 직전까지 네 눈을 보고 싶어'하는 나의 행위는 그런 삶의 목적을 각인하기 위한 응답처럼 여겨진다.
영화 같은 삶, 비단 위아래로 요동치고 굴곡지는 삶만이 그 의미를 배가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삶이 중요한 이유는 살아감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모호성에 빚을 지고 삶의 한 측면을 지속적으로 발굴하려는 시도는 충실하게 삶을 위한 발돋움으로 이행될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본 세계는 당신의 영화]가 던지는 의문들은 수없이 반복해 왔을 비슷한 주제였을지라도 퇴색되지 않고 자그마한 의미를 발하게 된다. 레이먼드 카버가 던진 삶에 대한 무구한 아이러니를 담보하면서 꼼꼼하고 진득하게 파고들어 '당신이 본 세계'는 곧 당신이 지나온 영화 같은 삶에 기인하고 있다는 걸, 그리하여 우리가 만나게 될 일들 또한 '너'와 함께하는 일임을 알리면서.
안정욱 인턴기자. 스타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