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 속 얽히고설킨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간 가사가 작품 내부에 차지하고 있던 영역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사는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서려 있기도 했거니와, 동시에 '좋은' 가사란 상당한 구체성을 기반으로 서사와 공간을 마련하는 식으로 일방적이게 정의되는 것을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은 '좋은' 가사의 한 면을 책임지는 표현이겠지만, 그것만이 '좋다'는 본질에 도달하는 데 역부족하다. 또한, 본작의 경우와 같이 가사의 구체적인 표현들을 뒤로한 채 모호함을 무기 삼는 작법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하지는 않을까.
가사의 문학성을 근거로 음악적 성취를 판별하려는 취지의 입장은 아니다. 늘 경계하건대 하나의 요소에만 집중한다면, 더욱이 중점적으로 다뤄져야 할 부분들을 놓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클래식을 감상할 때를 떠올리면, 선율이 그리는 심상적인 형상에 기인하고 파고들면 조성이나 화성 등 음악적 변화와 기교에 더욱이 관심을 둔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경로이다. 음악 비평에서 음악이 중점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며 필연적으로 그 속성을 함의한다. 앞선 가사에만 한정 지어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론은 가사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않는 절반 영역의 음악을 상실하는 일이 될 것이고 그리 음악을 바라보는 데 건강한 방식도 아니게 된다. 더군다나, 음악 비평이 문학 비평의 안쪽으로 예속된다면, 음악 비평만의 특기를 상실하게 되지는 않을까 와 같은 우려도 함께 짙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논의를 기어코 꺼내 둔 것에 두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각 태에 맞는 해석의 필요성이 때때로 거론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가령 몇몇 수식 - 난해하다, 모호하다 - 들을 통해 함축하듯 얼렁뚱땅하게 넘어가는 데에 개인적인 반발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양식과 내용으로 각각 대변되는 음악과 가사는 그 어느 하나 독단적으로 시행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음악들을 통해 내용의 자리가 비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티스트의 의도에 따라 배제된 것으로 읽어내는 것이 옳을 것이며 이 경우 내용은 양식의 측면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을 고스란히 유라의 작품으로 투영시키면, 유라의 작품이 '난해하거나 모호하다' -> '그래서 좋거나 좋지 않다'로 축약되는 과정이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때론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미완성이 남기는 모호함과 의도적인 감춤은 서로 형태부터가 다르고 유라의 방식은 철저히 후자에 가깝다. 그 과정을 미숙하더라도 짚어나가는 것이 이 글의 주요 작동 원리가 될 것이다.
지난 『GAUSSIAN』 (2021)에서의 작법적 성취를 떠올려보자. 유라는 구체적인 장면을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자유로운 주체의 발화 방식을 택한다. 「분홍」의 한 구절, '미련은 사방으로 털어버리자 / 한 다발에 꽃을 나에게 건네자'를 곰곰이 떠올려보면 가사의 주체는 분명 내가 아닌 나 바깥의 존재가 엿보인다. 이에 대한 흔적은 '내가 그린 그림 속에 나'라는 표현을 통해 분열된 자아의 한 상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으며 나와 경계 너머의 또 다른 나를 인식하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손가락으로 아 긋기만 해도」 에서 그런 화자의 분열들이 시각적인 상상력으로 투영되는 과정이 특히 인상 깊었는데, 스스로를 '윤곽도 없는 벽'으로 지칭하던 후 곧 '엉망의 해변가'로 격하시키기도 하며, 부재되어 혼동해 가는 모습은 '가짜의 줄무늬'를 통해 'Zebra'처럼 무엇이든 연출될 수 있음을 시적인 연동을 통해 유려하게 전개한다. 무언가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잘 영글어진 텍스트의 속성이 그러하듯, 부분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모호함이 유라에게 있어 주된 강점이라 할 수 있었다.
재즈와 록의 어법을 넘나드는 만동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2022)는 재즈의 즉흥성이 담보하는 모호함마저 덧입히며 그 바운더리를 넓힌다. 무엇보다 그간 몽환적이고 생소하게 조직된 가사의 키워드들은 기존의 자리를 되찾은 듯 활기를 띠고 더블 베이스와 기타, 드럼으로 이루어진 음습하고 매혹적인 앙상블은 신비감을 잔뜩 머금는데 일조한다. 워드 플레이 하듯, '매끄러운 사유와 겁 없는 처세'를 가능하게 만드는 유라의 존재감은 요술적 존재 그 자체다. '끓어오르는 열망을', '끄집어내려는 물방울'의 형태로 연성하던 연금술사의 이미지로, 부글거리는 솥 앞에서 땀을 흘리며 자신의 농익은 결과물을 저어내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점 넓어지는 삶의 구멍을 '공'으로 연결지어 '낭만의 뜨개'를 뜨기도 한다. (「시간을 아우르는 공」) 앞선 「분홍」의 상황과 비슷하게 주체 바깥 타자화된 자신으로 여겨지는 '샐리'를 향해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당부를 건네고(「샐리 넌 과감해질 필요가 있어」) 이는 자신의 주관을 확고히 하는 신념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런 분위기는 기회'였던 것처럼 유라는 걸직한 결과물들을 통해 농익은 가사가 주는 시적인 율동을 선점했다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러한 흐름을 수용하며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에서 감지되는 모호함 역시 그간 겹겹이 쌓아온 유라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가사의 정서와 음악의 맵시가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앞선 시도들은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고, 수필보다는 시의 방식이 주는 아이러니함을 본 작에서도 고스란히 답습했다. 그녀가 흩뿌려둔 정황들은 앨범의 줄기가 되었고, 그 앞에 ‘며칠 전 꿈 덕분에 증발되어 가던 한 사람에 대한 영역이 벌집처럼 촘촘해졌습니다’ 라며 단초를 던져두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가능하겠으나, '일련의 궁상맞은 체화의 과정', '할머니'와의 조우이거나, '몇 년 전 몇십 년 전 반사된 모습'은 시공간을 초월해 나타나는 '나'에 대한 환각들로 유추되곤 한다.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는 하덕규의 문장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이고, 『GAUSSIAN』때와 비슷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커버는 정적인 긴장감 마저 내포하며 바깥의 청자를 대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본 작에서 가장 밀도 높게 묘사된 곡이라 말할 수 있을 「수풀 연못 색 치마」는 유라의 작법 역량이 최대로 힘을 발휘한 곡이기도 하다. '차임벨 소리'를 통해 '상실'을 주문하며, 할당된 '적색의 체리 나무'를 '빈틈없이 다 먹어버리자'는 의지는 몇 구절만으로 선명한 질감을 남긴다. 이러한 의지는 '아름답지 않은 하늘 밑에서 / 고르지 않은 길도 가보자'는 결심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결심을 유발하게 만든 이전의 상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데, 앞서 환각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허무한 허무함의 패턴」에서의 몇몇 표현들을 조합하면, '형체가 없고', '불완전'하며, '피상적인 동굴'은 꽤나 휘발되는 나의 다양한 양태들이며, 이와 대비되는 색채를 가진 '적색의 체리 나무'는 '-하자'로 귀결되는 종결 어미와 함께 자체적인 메시지로 내포해 보이기도 한다. 꿈 결 같이 언제라도 흩어질 나의 면면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초연함을, 어쩌면 꿈속에서 꿈에 잠식되지 않고 스스로를 조련해 내려는 일처럼 읽히기도 한다.
무릇, 생소한 키워드의 조합, 부피 큰 단어들이 기묘한 이미지를 겹쳐내며 움직임을 만드는 연상 작용만이 이 음반을 긴장하도록 조율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에서의 연장선처럼 본 작을 통해 본격적으로 재즈의 어프로치를 이용하며 유라의 언어는 함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구운듯한 얼굴이 너의 모티프」 불안하게 엄습하던 현악의 선율을 따라 유라의 음성이 묘하게 겹쳐지고 후반부 악기들의 다양한 필인들이 혼잡하게 성키는 구간은 흠칫하게 만드는 매력이 담겨 있다. 퓨전 재즈의 혼잡함이 모호한 '모티프'의 구성원이 되며, 곡의 마무리는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끝마친다. 이런 불안감은 이어지는 트랙 「목에게」기묘하게 반복되는 음들을 따라 드럼이 자근거리며 바탕을 마련하고 그 위를 개이치 않고 뛰노는 유라의 음성에 덧대여진다. 중반과 후반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위치한 트레몰로 기법은 조금씩 잔향을 섞고 깊숙하게파고든 후, 다시 수면 위로 건져진다. 「따갑고 부끄러워지는 것」에서 드럼 앤 베이스의 그것처럼, 속도감 있게 몰아치는 드럼의 속주는 영화 '위플래시'의 마지막 시퀀스처럼, 몰아치는 절경을 배치하며 한껏 종잡을 수 없는 사운드를 종합해 보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챠임 같은 소리로 서문을 여는 「수풀 연못 색 치마」에서도 드럼이 중간중간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고 틈틈이 보사노바 리듬을 삽인한 것 역시 완곡한 템포 조절의 원숙함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삼키는 잡식성도 함께 엿보인다. 본 작에 담긴 잡식성은 후반에 위치한 세 곡을 통해 좀 더 풀어내지는 듯하는데 「동물원」에서는 드림 팝의 성격이 훨씬 가미되어 있고, 반복적인 패드 리프와 '타타타'로 리프레인 마디가 담긴 「허영 깊은 분위기에 실오라기 같은 눈을 가진 자」이나 「허무한 허무함의 패턴」의 사이키델릭 한 록 문법들은 이질적일 수는 있으나 거대한 결에서 튀어보이지는 않는다.
혹자는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음악을 '해석'하려는 행위는 감상을 통해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음악의 본질을 헤치는 일이라고. 나 역시 음악은 유희적인 수단에 더 가깝게 위치하고 있음을 전제해두고 싶다. 그러나, 말해야 할 것은 말해져야 한다. 가사 속 숨겨진 진실들이 실은 별거 없었음을, 때론 아티스트 자체가 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텍스트는 한 텍스트 안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어야 하며, 나로서는 이번 유라의 가사들이 제대로 '말해지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한편이다. 이 글은 난해함 자체를 집요하게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난해함을 난해하게 버려두지 않기 위해 쓰인 것이다.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는 여전히 다양한 독법을 기다리고 있다.
안정욱 인턴기자. 스타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