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사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출간했다. 역사학자 김종성(옮긴이)은 작자 의도로 사실관계가 달라진 우리의 ‘불완전한 역사’를 바로잡으려 신채호가 옥중에서 서술한 ‘조선상고사’ 원문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다듬어 이 책으로 재탄생시켰다.
책 소개
신간 ‘조선상고사’는 독립운동으로 10년 실형을 받고 뤼순감옥에서 투옥 중인 신채호가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으로, 신채호가 순국한 지 12년이 지난 1948년에 출간됐다. 단군시대부터 백제부흥운동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시대 △제3편 삼조선 분립시대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5편(二) 고구려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구려·백제 충돌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 △제10편 고구려의 대(對)당나라 전쟁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 모두 11편으로 이뤄져 있다.
‘조선상고사’ 원문은 지금의 우리말과 큰 차이가 있어 내용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신채호의 기억력에 의지한 부분이 많아 연도나 명칭 등에 오류가 다소 있다. 이 책은 ‘조선상고사’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명백한 오류를 바로잡는 한편, 원문에 없는 해설과 주석을 별도로 추가함으로써 독자들이 더 쉽고 정확하게 신채호의 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출판사 서평
지난 천 년간 역사가들이 감추고 축소한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규명하다
신채호는 ‘역사는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기록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 상고사는 ‘작자의 의도에 따라 많은 사실관계가 달라진’ 불완전한 역사라 규정한다. 특히 묘청이 유교도 김부식에 패배한 이후 이 땅에는 유교도가 득세하게 됐으며, 그 영향으로 중국을 높이고 스스로를 낮춰 역사를 서술하는 경향이 지배하게 됐다고 단언한다. 이는 신채호가 ‘유교도 김부식’과 그가 서술한 ‘삼국사기’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다. 또한 “내란의 빈발과 외적의 출몰이 우리나라 고대사를 쓰러뜨리고 무너뜨렸다”는 안정복의 의견에 대해 “내란이나 외환보다는 조선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선사가 쓰러지고 무너졌다”고 밝힌 까닭이기도 하다.
이에 신채호는 그 당시 “현존하는 서적들을 갖고 장단점을 파악하고 대조”해 천 년 이상의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축소된 우리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통해 ‘삼국사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단군의 시대를 많은 부분 할애해 서술하고, ‘대중국 투쟁’의 선봉에 선 고구려의 역사를 중요하게 기록한 것 등은 ‘작자의 의도로 사실관계가 달라진 불완전한 역사’를 제대로 서술하고자 한 그의 의지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를 수립하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단군, 기자, 위만, 삼국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역사인식 체계를 부정하고,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를 설립했다. 훼손된 단군의 시대를 재조명함으로써 고조선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음을 명확히 규명했으며, 동부여와 북부여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두 나라를 우리 민족의 근원으로 포함시켰다.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반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일축했다.
신채호의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는 삼국시대 서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처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상고사를 개탄하며, 그 대신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고구려와 백제, 가야, 신라 등의 역사를 균등히 기록하고자 노력했다. ‘삼국사기’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백제가 ‘조선상고사’에서는 부여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중요하게 서술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단재 신채호의 독립투쟁 활동의 사상적 근간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다’는 ‘조선상고사’의 머리말 격인 총론에 나오는 명제다. 신채호는 계속해서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높이면 투쟁의 승자로서 미래 역사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반면에 ‘아’가 파멸돼 ‘아’가 ‘비아’에게 바쳐지면 투쟁의 패자로서 역사의 흔적 정도로 그치고 만다”고 강조한다. 즉,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아와 비아와 투쟁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채호는 우리 역사를 우리 민족인 ‘아’가 ‘비아’인 다른 민족과의 투쟁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이와 같은 ‘역사는 투쟁의 과정’이라는 인식은 일제강점기 당시 신채호가 행한 다양한 독립투쟁 활동의 사상적 근간이었다.
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기대와 달리 승자가 아니라 패자가 되는 사람들이 항상 생겨나는” 까닭을 역사로 살펴봄으로써 ‘지금’을 경계하고 ‘훗날’을 준비하고자 했다. 신채호에게 한국사 연구는 독립투쟁의 또 하나의 방편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신채호의 역사 인식과 시대 인식이 담겨 있는 ‘조선상고사’는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기록이다.
저자 소개
· 지은이 신채호
역사가이자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1880년 충청남도에서 출생했다. 호는 단재(丹齋), 가명은 유맹원(劉孟源)이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성균관에 입학해 26세가 되던 1905년 성균관박사가 됐다. 그해 ‘황성신문’의 기자가 됐고,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
1907년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했고 시론, 논설 등을 쓰며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언론운동을 펼쳤다. 또한 ‘독사신론’을 포함한 역사관계 논문과 다수의 영웅전을 써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 고취에도 힘썼다. 1910년 신민회 동지들과 중국 칭다오로 망명한 후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에 전념하는 한편 답사와 저술 등을 통해 상고사 연구에 힘썼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한 그는 5월 대만에서 체포돼 다롄으로 이송됐다. 1930년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으로 이감됐으며, 1936년 옥중에서 뇌일혈로 순국했다.
· 옮긴이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문화유산채널’(옛 ‘헤리티지채널’)의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문화유산채널’에 명사 칼럼, ‘민족 21’과 웅진씽크빅의 ‘생각쟁이’에 역사 기고문을 연재했으며,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히, 스토리’,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기업인들에게 한국사,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외부 강사로 삼성 신입사원들에게 역사를 강의했다. 기독교방송(CBS) ‘김미화의 여러분’과 교통방송(TBS) ‘송정애의 좋은 사람들’ 등에서 역사 코너에 출연했고, 불교방송(BBS) ‘아름다운 초대’의 ‘재미있는 조선사’ 코너에 출연했다.
지은 책으로 ‘대논쟁 한국사’,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세종이다’,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 ‘패권 쟁탈의 한국사’, ‘신라 왕실의 비밀’,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조선 노비들’,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 ‘왕의 여자’, ‘한국사 인물통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발해고’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1천 년을 참은 신채호의 외침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 시대
제1장 고대 조선 총론 | 제2장 대(大)단군왕검의 건국 | 제3장 수두의 전파와 문화의 발달
제3편 삼조선 분립 시대
제1장 삼조선 총론 | 제2장 조선 분립 이후의 신조선 | 제3장 삼조선 분립 이후의 불조선 | 제4장 삼조선 분립 이후의 말조선 | 제5장 삼조선 붕괴의 원인과 결과
제4편 열국쟁웅 시대(중국과의 격전 시대)
제1장 열국 총론 | 제2장 열국의 분립 | 제3장 한무제의 침입 | 제4장 계립령 이남의 두 신생국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1장 1세기 초반 고구려의 국력 발전과 그 원인 | 제2장 태조대왕·차대왕 두 대왕의 문치 | 제3장 태조대왕·차대왕의 한족 축출과 고토 회복 | 제4장 차대왕의 왕위 찬탈 | 제5장 차대왕의 피살과 명림답부의 집권 | 제6장 을파소의 재상직 수행
제5편(二)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제1장 고구려의 대(對)중국 패전 | 제2장 고구려와 선비족의 전쟁
제6편 고구려·백제의 충돌
제1장 고구려·백제 관계의 유래 | 제2장 근구수왕의 무공과 고구려의 위축(백제의 해외정벌) | 제3장 광개태왕의 서진 정책과 선비족 정복 | 제4장 장수태왕의 남진 정책과 백제의 천도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제1장 4개국 연합군의 전쟁과 고구려의 퇴각 | 제2장 백제의 북위 격퇴와 해외식민지 획득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1장 신라의 발흥 | 제2장 조령·죽령 이북 10개 군의 쟁탈 문제 | 제3장 동서(同婿) 전쟁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
제1장 임유관 전투 | 제2장 살수 전투 | 제3장 오열홀·회원진 양대 전투와 수나라의 멸망
제10편 고구려의 대(對)당나라 전쟁
제1장 연개소문의 서쪽 여행과 혁명 | 제2장 요하 전쟁 | 제3장 안시성 전투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1장 부여성충의 위대한 전략과 백제의 영토 개척 | 제2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 제3장 부여성충의 자살 | 제4장 신라·당나라 군대의 침입과 백제 의자왕의 체포 | 제5장 백제 의병의 봉기(부여복신의 역사) | 제6장 고구려의 당나라군 격퇴와 백제 의병의 융성(부여복신의 역사) | 제7장 부여복신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란
책 속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파고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다. _ 21쪽, ‘제1편 총론’ 중에서
기존 역사서에서는 삼조선 분립 사실을 빠뜨렸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란 용어를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로 잘못 해석했다. 삼조선은 신·불·말, 세 한이 분립한 것으로,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불한과 말한은 부왕(副王)이었다. (중략) 신한·말한·불한은 이두로 진한·마한·변한이라 표기됐고, 신조선·말조선·불조선은 이두로 진조선·막조선·번조선으로 표기됐다. _ 119쪽, ‘제3편 삼조선 분립 시대’ 중에서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활쏘기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해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해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_ 163쪽, ‘제4편 열국쟁웅 시대(중국과의 격전 시대)’ 중에서
고구려가 요동·낙랑 등을 회복한 사실이 ‘고구려 본기’ 태조대왕 편이나 ‘후한서’에는 기록돼 있지 않다. 하지만 ‘구당서’의 ‘가탐 열전’에는 ‘요동·낙랑은 후한 건안(建安) 시대에 함락됐다’고 기록돼 있다. (중략)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한 뒤,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약 70리에 환도성(丸都城)을 수축하고 서쪽 경영의 거점으로 삼는 한편, 국내성·졸본성과 함께 삼경(三京)으로 삼았다. _ 230쪽,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중에서
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盛)과 희(熙)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大) 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_ 298쪽, ‘제6편 고구려·백제의 충돌’ 중에서
신위례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자, 놀란 두 가라는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신라·백제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고구려를 막기 힘들다고 판단해 두 가라에게 동맹 가입을 종용했다. 이로써 신라·백제 양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이 신라·백제·임나·아라 4개국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으로 바뀌게 됐다. _ 312쪽,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중에서
수나라 군대가 강의 중간에 도착하기 전에 상류에서 모래주머니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물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다. 이런 상태에서 을지문덕 부대가 후미를 습격했다. 수나라 군인들은 칼과 활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도착한 후에 강을 건너 달아났다. _ 399쪽,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 중에서
하지만 연개소문은 다르다. 그는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꿨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한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해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췄다고 봐야 한다. _ 466쪽, ‘제10편 고구려의 대(對)당나라 전쟁’ 중에서
솝울이 적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체포되자, 임자·충상 같은 매국 세력과 한패였던 고관·귀족의 대부분은 자신의 성읍을 바치고 적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성충의 일파로 몰려 퇴직했던 옛 관료와 초야의 의사(義士)들은 망국의 재앙을 물리치고자 각지에서 봉기했다. 신라 역사가들은 이 열렬한 다물 운동의 의사들을 잔적(殘賊)으로 몰고 그들의 발자취를 없애고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_ 504쪽,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중에서
◇ 신간 ‘조선상고사’
· 지은이 : 단재 신채호
· 옮긴이 : 김종성
· 출판사 : 시공사
· 판형 : 152×225㎜(무선)
· 쪽수 : 524쪽
· 가격 :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