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리뷰] 슈게이즈의 공간, 브로큰티스 -추락은 천천히
[소소한 리뷰] 슈게이즈의 공간, 브로큰티스 -추락은 천천히
  • 안정욱 인턴기자
  • 승인 2023.06.28 2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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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에게는 고유한 화풍이, 영화감독에게는 독자적인 구도 설정이 한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크게 일조하는 경우가 잦다. 때때로 미술'적', 영화'적' 등 접미사의 결합과 함께, 장르 속에서 그것만이 할 수 있다는 당위적인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음악의 경우, 음악을 음악'적'으로 만드는 특질들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악기가 이끄는 선율에, 혹은 보컬의 목소리에,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가사에 귀를 귀울여야 할까.

소리의 공간성은 여타 부류에 비해 서로 영향을 크게 주고 받는다. 사이먼 레이몬즈의 말처럼이나 '회화나 조각과 달리 소리는 서로 간섭'되고 그것을 '나란히 전시할 방법은 없'을 정도로 부피가 크고 동시에 널리 퍼져갈 정도로 가볍다. 한꺼번에 두 곡을 감상하기는 힘들 정도로 서로에 대한 침범도 잦다. 그러니 음악'적'이란 이런 식으로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누군가 침범하기 어려울 정도로 몰입된 공간성을 재현하는 것이 바로 음악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라는 걸.

추락은 천천히
추락은 천천히

침몰의 형태가 직시된 [추락은 천천히]는 이를 토대로 최상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최적의 상태를 제시해냈다.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구현하고, 그 공간의 핍집성을 '음악적'으로 설명해내는 방식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어렴풋이 그려지는 형체 없이 요동치는 감정을 적절하게 담아내기 위해 그릇을 뒤적거리고, 그 형태가 얼마만큼 정확하게 묘사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앞서, 가시화할 수 있다는 과정에 중심을 두는 식이다. 그에게 있어 슈게이즈는 장르적인 특성보다 담아내기 위한 그릇에 가까워보였다. 슈게이즈의 작법 아래, 장르의 기원이 되는 '신발을 응시하는' 행위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깊숙하게 파고드는 피학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결코 급작스럽고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고, 스스로를 가라앉혀 감정이 밑바닥에 부닥치는 옅고 둔탁한 음을, 그리하여 가장 깊고 이질적인 소리를 묘사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수면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처럼 비견될 수 있었다.

선율을 책임지는 명징한 기타톤과는 대비되게 지저분하게 늘어진 리버브함은 그 윤곽을 오히려 선명하게 내비친다. 가령 그것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있다는 것은 확언할 수 있다. 광포하게 수놓인 바깥의 소음과 예민하게 충돌하는 멜로디는 각자의 층위에서 지금 서 있는 공간의 상태와 심정을 돌이키게 만든다. ('해가 다 꺼질 때까지 / 난 걷고 또 걸어도 봤지만 연 곳은 하나 없어 / 신기루 속 환상처럼 어딜 걷고 있는 걸까') 일렉기타의 양가적인 접근, 소용돌이 치다 말고 흩어져버리는 목소리, 강한 치찰음을 남기는 드럼은 모두 이런 공간감을 형성하는 각각의 오브제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오브제들이 힘을 싣게 되는 순간은 'Farewell to a long Night'을 기점으로 국면이 전환되면서다. 물론 이런 갑작스러운 전환이 그리 유기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일렬로 이어진 'Heaven express(again)', 'Spring', '잠수병'은 그간 쌓아진 이모(Emo)한 감각을 단번에 소급해내는 여운을 남긴다. 몇 대의 기타와 함께 겹겹히 꾹꾹 담은 감정을 풀에헤치고 각종 변주들, 트레몰로가 스며들고, 일렉의 사이렌과도 같은 날선 소리, 건반의 코드 등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Spring'은 단어가 주는 생명감만큼이나 앨범에서도 가장 활기를 띄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의 공간은 더 이상 검게 칠해진 어둠과도 같은 곳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추락은 스스로를 밀어트리는 자해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는 '다시 떨어질 수 있기를', 그럼으로 '다시 또 불타오르길' 바랄 수 있는 저 끝을 보고온 자이다. 자신이 믿고 보고온 것을 다시 말할 수 있을 때, 감싸고 있는 공간은 두렵지 않게 된다. 이때, 그가 만들어낸 공간을 그 스스로 다시 정의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저히 언더그라운드한 장르로서 치부되어 소통을 거부하고 진입장벽을 지닌다는 편견과는 다르게, 거친 작법 속에서 연약한 감정선을 가미해 활기를 불어넣는 성과들은 앞으로 슈게이즈의 미래를 고무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어쩌면 90년대 모던의 흐름이 그러했듯, 2021년에 이르러 슈게이즈 바람이 부는 것 또한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할 수 있을까. 충분히 슈게이즈에게 그런 '공간'이 형성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안정욱 인턴기자. 스타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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